“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태복음 25:35 후반부 말씀)
130여 년 전 조선으로 갔던, 감리교 여선교사들은, 조선의 여성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꼈습니다. 그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도움을 주고, 희생해야 하는 존재였지, 한 사람의 동일한 인격체로 여겨지지 않았고, 그런 의식조차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름이었습니다. 어려서는 누구 집 딸로, 결혼 후에는 누구 댁으로, 자식을 낳은 후에는 누구 어멈 혹은 할멈으로 불렸습니다. 철저히 남성 중심의 칭호였습니다. 이것이 ‘이름 없이’ 지내 온 전통사회의 여성이었습니다. 이 ‘이름 없음’은, 곧 ‘존재 없음’의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존재 없음’의 여성들에게, ‘여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성과 동일한 존재’라는 존재 의식을 심어주는 일에 앞장섰던 이들이 바로 감리교 여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조선 여성이라는 ‘존재 없음’을 넘어, 수많은 여성들의,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보살피며, 그들에게 ‘존재 있음’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주었던 이름 셋 가진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김점동, 김에스더라고도 불렸던, 조선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입니다.
박에스더는 비록 미국에서 태어난 지 몇 개월 안 된 딸의 죽음과 볼티모어 여자 의과 대학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은 1900년 4월 28일 33세의 남편이 폐결핵으로 죽게 되는 역경과 좌절을 경험했지만, 1900년 5월 서양 의학을 공부한 조선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됩니다.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이 말씀은 조선 최초의 여자 의사였던 박에스더의 남편이었던 박여선 선생의 묘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박여선 선생은 박에스더가 의사가 되는데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숨은 공로자입니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편안함과 안락함을 포기하고, 귀국한 박에스더는, 자신의 안위보다 환자들의 치료를 우선적으로 생각했기에, 전염병이 유행할 때도, 환자들의 집을 직접 방문해 치료하고, 약을 전하며, 그들에게 복음과 평안을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박에스더는 환자들의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 불안감, 두려움까지도 어루만져주었던,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박에스더는 의료선교사로서 의료활동을 통해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선교활동을 통해서도, 조선의 여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특별히, 전도부인을 양성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전도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위생학을 가르치며, 수많은 전도부인들이 양성되어, 어둠에 갇혀있던 조선 여성들에게 복음과 희망의 빛을 선물했습니다.
하지만 10여년의 짧은 사역을 마치고, 1910년 4월 13일 남편과 같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박여선 선생이 돌아가신지 123년, 박에스더 선생이 돌아가신지 113년이 되는 4월.
이들의 헌신과 섬김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기억’하며, 두 분이 걸으셨던 예수님의 길을 오늘 우리가 걷기를 소망합니다.
매년 4월 28일 기일에 찾아갔었는데, 올해는 하루 늦게 성도님들과 찾아 이 두분의 삶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